성해나 작가의 장편소설 『혼모노』는 읽는 내내 조용하지만 분명한 파장을 남기는 책입니다. 특별히 드라마틱한 사건이 있는 건 아니에요. 그런데도 책장을 덮고 나면 한동안 멍하게 앉아 있게 됩니다. 무엇보다 놀라웠던 건, 이 소설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는 느낌이었습니다. “너는 어떤 역할로 살아가고 있니?” “그건 정말 네가 원해서 선택한 거니?” 같은 질문들이 조용히, 그러나 확실히 다가왔어요. 오늘을 살아가는 젊은 세대에게 이 책은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. 조용히 흔들고, 천천히 각성시키는 방식으로요.
나는 누구인가, 그 물음이 시작되는 자리
『혼모노』의 첫 장을 넘기는 순간부터, 독자는 ‘나’라는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. 이 작품은 뚜렷한 사건보다 인물의 내면, 생각, 감정의 흐름을 따라가는 소설이에요. 주인공은 특별하지 않습니다. 오히려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사람이고, 어쩌면 나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. 가족과의 관계, 연인과의 거리감, 사회 속에서 맡은 역할, 그리고 그 안에서 점점 흐려지는 ‘진짜 나’. 소설은 그 복잡한 감정을 섬세하게 풀어냅니다. 주인공은 남들이 보기엔 아무 문제 없어 보이는 삶을 살아갑니다.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늘 어딘가 불편한 감각이 있습니다.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고, 지금 하는 선택이 정말 자신의 것인지도 헷갈립니다. 바로 그 지점에서 독자와 연결돼요. 특히 20대 후반, 30대 초반의 독자라면 이 인물의 감정선이 너무 익숙해서 마음이 아릿해지기도 합니다. 성해나 작가의 글은 직설적이지 않지만, 묘하게 직격합니다. 담담하게 서술되는 감정들이 페이지를 넘길수록 쌓여서 결국 ‘나도 저랬는데’ 하는 공감으로 터져 나옵니다. 소설 속 인물의 고백이 내 고백 같고, 그가 던지는 질문이 곧 내 질문처럼 느껴지는 경험. 『혼모노』는 그런 책이에요. 소리 없이 스며드는 이야기지만, 그 잔상이 꽤 오래 남습니다.
젊은 세대가 처한 관계의 피로와 사회적 역할
이 소설이 젊은 독자에게 강하게 다가오는 이유는, 단순히 ‘정체성’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니에요. 우리가 매일같이 겪고 있는 관계의 피로, 사회 안에서의 기대와 책임감, 그런 것들이 이 소설 전반에 걸쳐 조용히 흐릅니다. 작중 인물은 누군가에게는 착한 딸이고, 누군가에게는 적당한 연인이며, 또 직장에선 무난한 동료로 살아갑니다. 그 역할들은 어딘가 익숙하지만, 동시에 숨 막히게 다가오기도 합니다. 그렇게 타인의 기대에 맞춰 살다 보면, 문득 거울 속 자신이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이 오죠. 『혼모노』는 그 순간을 아주 정확하게 포착해냅니다. 성해나 작가는 이 모든 상황을 과장 없이, 담백하게 그려냅니다. 그렇다고 무기력하게 느껴지지도 않아요. 오히려 이 책을 읽고 있으면, “아,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”라는 안도감이 생깁니다. 특히 사회 초년생이거나, 인생의 방향을 고민하고 있는 시기의 독자에게 이 책은 감정적인 지지이자 위로가 되어줄 수 있습니다. 더 좋은 건, 작가가 해결책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이에요. 『혼모노』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거나, 무언가를 하라고 말하지 않아요. 그저 당신이 지금 느끼는 혼란이,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이라는 걸 말해줍니다. 그리고 그걸 마주할 용기를 조용히 건넵니다. 책을 덮었을 때 가볍게 위로받은 느낌이 드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.
문장 하나하나에 담긴 여백과 감정의 리듬
『혼모노』의 문체는 젊은 세대, 특히 감정에 민감한 독자들에게 아주 잘 맞습니다. 긴 설명이나 복잡한 수사는 거의 없어요. 대신 짧고 리듬감 있는 문장이 이어지고, 그 속에 감정이 고스란히 담깁니다. 요즘 독자들은 과잉된 감정보다는 절제된 서술에 더 깊이 반응하는데, 이 작품은 그런 감성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어요. 어떤 문장은 단 한 줄만으로도 충분히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.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지고, 말하지 않아도 공감됩니다. 이건 작가의 감각이 아니면 쉽게 나올 수 없는 문장들이죠. 마치 말 대신 숨을 고르듯, 빈 문단이 주는 여백조차 의미를 가집니다. 그래서 이 책은 빠르게 읽히지만, 마음에는 천천히 남습니다. 또 하나 인상적인 건 이야기의 전개 방식입니다. 이 소설은 뚜렷한 기승전결이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, 감정의 흐름을 따라가며 진행됩니다. 그래서 독자는 인물의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들어가고, 그의 선택과 망설임에 함께 머물게 됩니다. 그런 방식이 오히려 지금 시대의 독자와 더 잘 맞는 것 같아요. 우리는 거대한 사건보다, 일상의 작은 감정 변화에 더 민감하니까요. 『혼모노』는 그런 감정의 진폭을 아주 조용하지만 섬세하게 짚어줍니다. 그래서 소설을 읽는 동안 내 감정도 함께 조율되고, 정돈되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.
성해나의 『혼모노』는 요란하지 않지만 깊게 파고드는 힘을 가진 소설입니다. 정체성, 사회적 역할, 관계의 피로 등 젊은 세대가 안고 있는 질문들을 아주 부드럽게 건드립니다. 그리고 그 질문에 스스로 답할 수 있도록 조용히 곁에 있어줍니다. 요즘처럼 방향이 흐릿하게 느껴질 때, 『혼모노』는 좋은 동반자가 되어줄 거예요. ‘진짜 나’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 싶다면, 이 책을 조용히 펼쳐보길 권합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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